[김칼럼, 서적 로르샤흐] 사람의 마음에 닿다

  총 671 페이지에 달하며 주석을 제외해도 총 580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책 표지에서의 로르샤흐의 강렬한 인상에 한 번, 그리고 그 두툼한 두께에 다시 한 번 압도당하고 책을 펼치게 됩니다. 사상 처음이자 유일무이한 로르샤흐 평전이라 할 수...

 


총 671 페이지에 달하며 주석을 제외해도 총 580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책 표지에서의 로르샤흐의 강렬한 인상에 한 번, 그리고 그 두툼한 두께에 다시 한 번 압도당하고 책을 펼치게 됩니다.

사상 처음이자 유일무이한 로르샤흐 평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로르샤흐의 일생과 더불어 로르샤흐 검사의 탄생과 발전 과정, 지각의 힘에 대한 탐구, 검사를 둘러싼 논쟁, 심리 분석의 역사 등 20세기 정신의학계에서 벌어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간 심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로르샤흐 책 후면에 서술된 소개 문구입니다.

이 책이 단순히 로르샤흐 검사를 이해하기 위한 일환으로 헤르만 로르샤흐의 일생을 단순히 되돌아 본다고 생각했던 본인은,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서 책을 덮은 후에야 이 후면의 문구가 얼마나 이 책을 잘 나타내는지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 후면 문구의 하단에는 추천사가 달려있습니다.

너무나도 귀중한 책이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로르샤흐의 짧은 생애와 그가 만든 심리검사의 역사를 사려 깊게 고찰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책장을 덮을 즈음이면, 로르샤흐와 로르샤흐 검사가 20세기 전체를 이해할 열쇠처럼 느껴진다.

엘리프 바투만, The Possessed의 저자

다양하고 새로운 자료 조사를 통해 예술가이자 임상의학자였던 로르샤흐의 매력 넘치는 생애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한마디로 멋진 초상이다.

피터 갤리슨, 하버드 대학교 조지프 펠레그리노 석좌 교수

이 추천사만 보고 이 책의 내용을 지레짐작한다면, 자칫 제가 저지른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로르샤흐: 잉크 얼룩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다'는 헤르만 로르샤흐라는 인물을 그 어떤 서적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파고들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헤르만 로르샤흐가 아닌 '로르샤흐 검사' 그 자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제가 로르샤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DC코믹스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왓치맨', 심지어 코믹스북은 아니고 코믹스북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영상 작품에서였습니다. 해당 작품에서는 로르샤흐와 같은 스펠링인 Rorschach를 쓰면서도 영어식 발음인 '로어셰크'로 불리게 되죠.

흑백으로 이루어진 기괴하고 매혹적인 가면은 끊임없이 변하는, 하지만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는 데칼코마니의 얼룩 모양으로 표현되어 로어셰크라는 인물(히어로)의 고뇌와 불안정함, 갈팡질팡하는 인간스러운 면을 잘 나타냅니다.

원작이나 영화에서는 비록 영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는 로어셰크이지만, 사실상 해당 작품의 주인공이자 작가의 분신으로서 작품의 메세지를 직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그는, 당연하게도 작가의 의해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므로 그에게 매료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잉크 얼룩 가면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겠죠.

로어셰크에 대한 관심은, 좌우 대칭의 잉크 얼룩 가면으로, 그리고 실제 로르샤흐 검사로 관심의 영역을 넓혀 나갑니다. 하지만 그러한 저의 관심은 적극적이지 않았고, 본격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2차 전공으로 심리학 강의를 수료할 때조차도 말입니다. 물론 심리학 수업에서도 로르샤흐 검사에 대한 언급이나 비중은 정신 분석의 프로이트나 융, 인본주의 심리학의 칼 로저스 등에 비해 현저하게 적었고, 수업 자료 혹은 전공 서적의 한 꼭지를 채울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시험이나 과제로도 출제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로르샤흐에 대한 관심도 멀어져 갔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로르샤흐 검사에는 뚜렷한 정답이 없다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로르샤흐에 대한 호기심이나 갈망은 잊혀지지 않고 마음 기저에, 강렬하지만 은근하고 조심스럽게 자리잡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수년을 조용히 묻혀있던 녀석이, 로르샤흐라는 책을 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저 마음의 기저에서 표면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나 방대한 양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의 당혹감과 압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로르샤흐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을 이 책이 충분히 채워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책은 헤르만 로르샤흐가 아닌 로르샤흐 검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글이든 그림이든, 창작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창작자를 이해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므로, 인간 헤르만 로르샤흐의 생애를 되짚어 보는 것은 당연하겠죠.

책은 인간 헤르만 로르샤흐를 아주 영리한 방법으로 서술해 나갑니다.

그 한 방법으로 당대 유명한 인사들을 서술함으로써, 예를 들면, 심리학 분야에서는 정신 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분석심리학의 개척자 카를 융, 문학 분야에서는 러시아 문학의 대가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을 서술함으로써 적어도 한국에서는,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로르샤흐가 은연 중에 이러한 유명 인사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인물처럼 암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헤르만 로르샤흐의 생애를 시간 순서로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정신분석학의 발생, 1차 세계 대전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실이 발발하게 되면서 매우 사실적이고 현실감 있게, 그리고 허구가 아닌 실체적으로 의심 없이 그의 생애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심지어 브래드 피트를 연상시키는 그의 실제 사진이 그에 대한 서술을 더욱 호감으로 받아들이는데 한몫하는 것을 무시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서술한 작가는 로르샤흐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호의적으로 서술되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인간 헤르만 로르샤흐는 파고 파고 미담만 나오는 좋은 아버지이자 남편, 훌륭한 상담자 및 연구자, 여기에 예술적 재능과 흠 잡을 곳 없는 인성까지 겸비한 완벽에 가까운 인간상으로 그려집니다. 여기에 불운한 어린 시절,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빛을 보기 시작해야할 그 순간 너무 갑작스러워서 안타까움을 배가하는 그의 마지막까지.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차치하더라도, 삶의 서사가 인위적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은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그의 인생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가 남긴 유산인 로르샤흐 검사도 당연히 매력적인 검사로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책을 중반쯤 읽어나가면서 독자는 불안감에 빠질 것입니다.

아직 책 분량이 절반이나 남았는데, 인간 헤르만 로르샤흐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테니까요.

로르샤흐의 죽음이 다가올 수록, 그럼 책의 나머지 절반은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책은 로르샤흐의 일생을 되돌아 보는데 절반을 할애했다면, 나머지 절반은 그가 남긴 로르샤흐 검사에 할애합니다.

헤르만 로르샤흐의 생애 부분을 전반부라고 한다면 로르샤흐 검사 부분을 후반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로르샤흐 검사 역시 그의 삶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고, 그 우여곡절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죠.

이야기는 1880년대에서 시작하여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마무리가 됩니다. 이 후반부에서도 앤디 워홀 등이 언급되면서 조금 더 친밀하게 독자와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됨을 알 수 있습니다.

로르샤흐는 세상에 없는 시대가 되었어도 그는 사라지지 않고 로르샤흐 검사로 남아, 후발 주자들에 의하여 보완되고 발전되며, 때로는 왜곡되기도 하며 이야기를 끌고 나갑니다. 사실 이 과정은 전반부에 비하면 그리 흥미롭지 않습니다. 이 부분만큼은 전공 서적에 가까운, 학술에 대한 연구 논문을 쓰듯이 서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약간의 지루함을 감수하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데이미언 설스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글 쓰기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느낄 수 있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진 않겠지만, 전반부에서 그냥 흘러가듯 등장한 인물(만약 전공자이고 로르샤흐에 대해 어느 정도 연구했다면 이미 전반부에서 눈치챌 수 있겠지만)이 후반부에 로르샤흐 검사에 아주 결정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재등장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지루함을 싹 날려주는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비로소 로르샤흐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 로르샤흐라는 주제를 탈피하고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심을 자극하게 됩니다.

혹자는 이 책을 단순히 로르샤흐와 그의 업적인 로르샤흐 검사에 대한 찬양으로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로르샤흐 검사에 대한 옹호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만, 이 책은 결국 종장에 이르러서는 그보다 더 나아가 로르샤흐 검사가, 그리고 헤르만 로르샤흐가 다가가고자 했던 본질을 상기시키려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감히 제멋대로 해석하여 말합니다.

사람을 옳다,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에 그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인간을 판단하고자 하는 검사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에 대한 이해와 그 속에 숨겨진 마음에 닿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단순히 로르샤흐의 생애를 다룬 일대기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책은, 옳다와 그르다,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는 것에 익숙해진 현대에서 외면 당하고 있는 진실에 대하여, 로르샤흐라는 훌륭한 매개체, 혹은 촉매제로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본 서평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글밥 커뮤니티, 갈마바람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좋아할 만한 글

0 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