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칼럼, 보드게임 지우개 레슬링] 아빠는 다시 아들이 된다.

격세지감 /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  어제와 오늘,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돌아보면 문득 나이 듦을 실감하고는 합니다.  1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격세지감 /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

 어제와 오늘,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돌아보면 문득 나이 듦을 실감하고는 합니다.

 1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달려도 지치지 않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3분만 뛰어도 숨이 차서 못 뛰는 지경에 이르거나, 뱃살이 두툼하게 잡힌다거나, 1년 전에 입었던 옷을 오랜만에 꺼내 입어보니 꽉 끼어서 못 입는다거나...

 그리고 이런 나이 듦에 대한 인식과 같은 선상에 있으면서도 별개로, 세대 차이를 느끼는 경우도 있죠.

 박지성, 박세리, 박찬호 등 금의환향의 박씨 3인방을 요즘 아이들이 전혀 알아보지 못하거나(박찬호가 투 머치 토커의 아이콘으로 일종의 밈화 되어버린 것을 보면 그것도 참 미묘하게 느껴집니다), 한창 현역이었던 운동선수들, 배우들 등이 어느 새 현장에서 은퇴하여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거나, 감독을 한다거나, 요식업 등 다른 사업의 사장님이 된다거나 하는 것을 볼 때 말입니다.


 나라의 미래, 꿈나무라고 불리던 때가 아직 생생...한 건 아니고 살짝 가물거리지만 아무튼, 지금은 어느 새 현역은 커녕, 퇴물이구나 싶습니다.

그때 그 시절

 각 지상파 방송국에 배정된 TV 채널의 번호를 떠올릴 때도 그 세대를 느낄 수가 있는데요.
 SBS, KBS, MBC, EBS하면 각각 몇 번이 생각 나시나요? (SBS가 메인 방송이 아닌 지방 사시는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지방의 친척집이나 시골집에 갔을 때 SBS에서 해주는 방송을 봐야하는데 그 지역 방송사 자체 프로그램이 나오는 바람에 굉장히 짜증났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오르네요.)

 저는 6번, 7번(2TV), 9번(1TV), 11번, 13번입니다.
 아미 이 번호는 지금도 유효할 겁니다. 물론, SBS가 5번으로 바뀐 것 같지만요.

 그럼 2번하면 떠오르는 방송사는 어디인가요?

 저는 AFKN입니다.
 어릴 적 TV를 상당히 많이 봤던 기억이 있는데, 항상 2번에서는 영어가 나오곤 했습니다. 당연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고, 종종 야한(?)... 아닙니다.

 그러다 눈길을 사로 잡는 프로그램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WWF(현 WWE)였습니다.

▲ WWF 애티튜드 시대

 처음 WWF를 봤을 때의 그 충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물론 가장 강렬하게 남았던 장면은 위 사진에서 중간 하단에 있는 스티브 오스틴의 오른쪽, 더 락 옆에 있는 세이블이었습니다. 사진만 보더라도 꽤 수위가 높았다는 것을 눈치채실텐데, 이것을 실황 라이브로 봤다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해당 장면은 비키니 콘테스트였는데, 세이블이 비키니가 아닌 손바닥 모양의 스티커를 붙인 것을...읍읍!!(너무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함정)

...ㅗㅜㅑ

 링 코너 위에 올라서 맥주 두 캔을 맞부딪치며 사실 얼굴에 들이붓는 '스톤 골드' 스티브 오스틴의 터프한 퍼포먼스에, 당연히 맥주맛도 모를 꼬맹이가 어쩐지 시원한 라거의 청량감과 같은 쾌감을 느꼈...(어이)

 암전에서부터 이어지는 독특한 등장씬의, 쓰러져도 쓰러져도 그냥 벌떡 일어나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 공포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던 영원한 레게노 '언더테이커', 그리고 (각본상) 그의 동생 '케인', 그리고 언더테이커와 극한의 대립을 보여주었던 '맨카인드' 믹 폴리, 한쪽 눈썹만 들어올리며 '나 화나쪄'를 어필하던 엔터테이먼트 대장 '더 락', 통제불능의 악동 집단 '디-제네레이션 X', 어린 마음에 '왜 한 사람은 하얗고 한 사람은 까만데 한 가족이 되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특유의 유쾌한 플레이 스타일에 꽤나 좋아했었던 '더들리즈 보이즈', 쇠 파이프나 의자 등을 들고 얄짤 없이 뚝배기를 깨버리던 '하드코어 할리' 등 그 당시 활동 멤버 하나 하나가 모두 레게노급인 애티튜드 시대!

 지금 생각해도 어마무시한 멤버들인 것 같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저는 헐크 호건이 한창 전성기 시절로써 현역 생활을 하던 때의 세대는 아니랍니다. ← 그나마 어린 척)


 시도 때도 없이 이 모션을 따라해서 허벅지가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인지 박나래, 장도연 콤비가 이 포즈를 시그니처로 쓰고 있기도 하죠.
※본 동작은 디-제네레이션 X의 X를 형상화하는 것 같지만, 그 외에도 영 좋지 못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피니시였던 스코티 투 호티'디 웜'. 사실 이 준비 동작 때문에 피니시를 미처 완성시키지 못하고 패배했던 적이 훨씬 많은 것 같지만... PS2판 콘솔 게임인 WWE 스맥다운! 히어 컴즈 더 패인에서 스코티 투 호티를 커스텀 레슬러로 만들어서, 또는 다른 레슬러의 기술을 편집하여 이 기술로 피니시를 시전하면 자연스럽게 능욕이 되기도 했죠.


 물론 더 락'피플즈 엘보우'도 지금 생각하면 만만치 않게 말도 안 되는 피니시 기술이지만, 당시에는 흥미진진하게 보았습니다. 의도한 애니메이션 GIF는 아니었는데 여기서도 언더테이커가 상체를 곧바로 일으키는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누가 봐도 각본이 있는 것이 티가 나는데, 프로레슬링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면 어떻습니까? 물론 어렸을 적에는 모두 사실인 줄 알았던 순진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뭔가 속았다'라는 배신의 느낌도 있었지만, 지금은 고난이도의 기술을 부상 없이 접수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땀내나는 사나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한 편의 연극을 본다는 생각으로 감상하게 됩니다.

 야속하게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슬러들도 부상, 노화, 사건, 사고, 은퇴 등 크고 작은 일로 하나 둘 레슬링계를 떠나게 되었고, 물론 커트 앵글, 존 시나, 브록 레스너, 에디 게레로, 레이 미스테리오, 랜디 오턴 등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긴 했지만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애티튜드 시대에는 비빌 수 없을 겁니다. 심지어 새로운 세대라고 언급한 레슬러들조차 지금 기준으로는 이미 현역에서 은퇴를 했거나,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레슬러도 있네요.

 푸석푸석하고 칙칙해진 저 자신의 피부만큼이나 시들해져버린 프로레슬링을 보고 있자면, 복잡 미묘하게 씁쓸한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또하나의 그때 그 시절

 이 시절 제 동네에서는 특별히 완구류가 흔하게 소비되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집에 선가드볼트론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있다치면 너도 나도 '빌려달라'고 아우성이던 때였으니까요. 그러고보니 제 선가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요.
 아마 지금 아이들 사이에서도 누구 하나가 요즘 유행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있다면 빌려달라고 하는 건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지금처럼 학교에 보드게임이 교육용으로 쓰이거나 보급되던 시절도 아니었고, 그나마 장기, 바둑...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학교에 있었던 것 중 요즘 보드게임과 가장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던 것이 다이아몬드 게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던 곳이 뭐 강남8학군도 아니고, 물고기 비린내 나는 어촌에 불과한 인천(...은 과장입니다. 제가 살던 곳은 내륙이라 바다 구경을 할 수 없었습니다.)이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부자 집안이 있었겠습니까?

 아이들이 당시 놀 수 있는 것이라고는, 놀이터에서 술래잡기, 오락실 가기, 운동장에서 축구하기, 돌로 아스팔트 긁어서 땅따먹기 하기 등 원초적인 신체 활동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는 물론 공부를 해야하니까 쉬는 시간, 잠깐의 유희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 예를 들면 판치기, 홀짝, 말뚝박기 같은 것이 있었지요. 10~15분 정도의 짧은 쉬는 시간, 그리고 교실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최대한의 유희를 뽑아내야 하기 때문에 이때 즐길 수 있는 놀이는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좋았습니다.


 축구 필통은 단연 인기였지만, 이것도 돈 있는 아이들이나 살 수 있는 부르주아의 상징, 사치품입니다. 이와중에 사진 상으로 확인되는 인쇄 밀림이 살짝 신경쓰이지만 넘어가도록 하죠.

 우리에게는 좀더 대중적이고 그나마 돈이 적게 드는 학용품 놀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우개 따먹기입니다.

 당시에는 생일선물로 연필깎기를 받을 정도로(도대체 왜 연필깎이를... 그것도 2년 연속이나... 그리고 그걸 기억하는 저는...) 연필은 당시 초딩들의 필수품이었고 샤프는 나중에나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모나미 볼펜을 꼭지로 삼아 몽당 연필을 만들어 쓰는 노하우는 지금 생각하면 참...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아무튼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히 지워야 하니까라는 노랫말이 있는 것처럼, 연필을 쓰는 이상 지우개는 항상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엄마한테 사달라고 졸라도 흔쾌히 허락을 받을 수 있어 더욱 얻기도 쉽습니다. 저런 게임 기능이 있거나 변신 기능이 있는 필통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보다요.


 그리고 지우개 따먹기의 최정점에는 화랑 소프트 점보가 있었죠. 색깔도 꼭 분홍색이었습니다. 잠자리 주사위로 유명한 톰보 주사위도 있었지만, 톰보 주사위는 미술용으로써 유명한 것이었고, 그 흐물흐물한 느낌 때문에 지우개 따먹기 용으로는 부적절했습니다. 하지만 화랑 소프트 점보는 흐물거림도 없고 지우개 똥(?)도 그다지 많이 나오지 않아 내구성도 뛰어나면서 탄력도 좋아 단연 최강 지우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우개 따먹기가 진행된 후에는, 어느 한 아이가 지우개를 한 뭉터기 들고 집으로 가곤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제 경우 그저 승부만 가를 뿐, 승부가 끝난 후에는 지우개를 다시 주인에게 돌려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전 도박을 좋아하지 않고, 뺏고 뺏기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지우개 따먹기는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책상 위에서 지우개, 그리고 손가락만 있으면 되며 시간도 많이 소모되는 놀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단연 자주 돌아가는 놀이였습니다.

 살짝 말랑하면서도 통 튕겨지는 지우개의 손맛과, 상대 지우개에 걸쳐지거나 위에 올라가서 완전히 포개어질 때 느껴지는 짜릿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입니다. 지우개의 특성상 마찰이 강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플레이한다면 책상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만, 힘 조절에 실패해서 또르르 굴러 책상 아래로 떨어질 때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꺄르륵 거리던 기억도 있습니다.

두 추억의 공통점

 제 어린 시절의 기억 한 편을 차지하고 있는 프로레슬링과 지우개 따먹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두 장르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이미지와 유사한 진행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원초적이라는 것은, 섬세한 장치라던가 고도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유치하고 저급하게 생각되는 것 같은 일면이 있지만, 동물의 특성, 그리고 유아기의 특성으로 인하여 당시 가장 매력적인 요인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WWF는 그 근간이 스포츠 정신과 엔터테이먼트에 있기 때문에 비록 어느 정도의 규칙과 각본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상당히 자극적이었고 유혈 표현에 있어서도 지금보다 훨씬 극적이었습니다. 아마 어둠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이른바 파이트 클럽에 가장 가까운 스포츠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때는 아직 이종격투기가 등장하기 전이기도 하고, 물론 권투가 있었지만, 권투는 안전을 이유로 글러브를 착용하고 마우스피스 등 신체에 제약 및 보호구가 확실히 눈에 보였죠. 하지만 적어도 프로레슬링에서는 (실제로는 있었더라도) 아무 보호 장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며, 오로지 맨몸으로만 (물론 체어 샷이나 해머, 독극물 등 반칙 요소는 존재) 이뤄지는 힘 그 자체의 스포츠로 여겨졌습니다.

▲ 타지리의 '그린 미스트'.
기본적으로 반칙이기 때문에 심판이 못 보는 상황에서만 시전합니다.

 딱히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아동기의 남자 아이들은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힘에 의한 서열 정리에 대한 욕구가 남아있는 것인지 힘을 과시한다거나 육체 활동을 하는 것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흥미를 느낍니다. 특별한 장비없이 건강한 나의 몸과 나의 기술을 멋지게 맞아줄(?) 준비가 된 상대가 있다면, 프로레슬링의 시원시원하고 파괴적인 기술들을 구현할 수 있지요.

▲ 버버 레이 더들리의 '테이블 파워 밤'.

 당시 가장 많이 모방되었던 기술은 단연 언더테이커의 기술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뛰어줘야 되는 건 줄도 모르고) 한 손만으로 목을 잡고 상대 레슬러를 높이 들었다가 바닥에 내치는 초크슬램과 가랑이 사이에 상대의 머리를 끼고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내리꽂는 툼스톤 파일드라이버가 뭣도 모르고 자주 시전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 언더테이커의 '초크슬램'.

▲ 언더테이커의 '툼스톤 파일드라이버'.

 당연히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에(다른 레슬링 기술들도 물론), 보호자의 지도 및 제재가 필요합니다. 특히나 파일드라이버는 자칫하면 목뼈가 부러져 전신 마비, 더 나아가서는 사망에 이를 수 있으므로 절대 따라하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지우개 따먹기의 경우는 어떨까요?

 지우개 따먹기에는 힘이 그렇게 중요한 놀이는 아니지만, 아동이 직접 자기 손으로 하여금 얼마간의 힘 조절이 들어가게 됩니다. 지우개와 나 사이에 다른 도구가 끼어들지 않고 온전히 맨손으로 움직이게 되면서 촉감도 느낄 수 있고, 내 힘과 행동으로 인한 결과가 즉각적으로 발현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만족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도구 없이 직접 손을 이용하여 지우개를 움직였을 때 즉각적인 피드백을 확인할 수 있고 그 결과까지 단순하고 명료하다는 점에서 지우개 따먹기는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규칙적인 부분에서의 유사점은 바로 핀폴입니다.

 기본적으로 프로레슬링은 상대방의 두 어깨가 바닥에 완전히 닿은 상황에서, 상대가 옴짝달싹 못하게 상대방 위로 내 몸으로 덮어, 심판이 세 번 바닥을 내리칠 동안에도 상대가 두 어깨를 바닥에서 떼지 못한다면 내가 승리합니다.

 지우개 따먹기에서도 핀폴과 유사한 개념이 있습니다. 물론 지역마다 차이는 존재하지만요.

 내 지우개가 바닥에는 닿아있지만 상대 지우개 위에 살짝 걸친 상태로 덮었다면 1점을 얻는 기본 규칙 외에, 상대 지우개 위에 내 지우개가 완전히 올라가게 되면 즉시 승리를 한다거나, 2~3점으로 기본 점수보다 더 많은 점수를 얻는다거나 하는 규칙이 있죠.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우위를 표시하는 것이, 항상 내(지우개)가 어떤 형태로든 상대방 위를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은연중에 힘의 상하관계가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도 어떤 의미에서는 원초적인 부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로레슬링과 지우개 따먹기를 합친다면?

▲ 지우개 레슬링 프로토 타입.

 프로레슬링과 지우개 따먹기를 합친다는 상상은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입니다.

 지우개 레슬링은 2019년 비콘에서 파란만장한참개암나무(이하 개암나무)님께서 가지고 오셨던 곤충 올림픽(가제)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곤충 올림픽은 5가지 정도 되는 미니 덱스터리티 게임을 모아놓은 일종의 집합체로 단순하지만 원초적이고 직관적인 규칙을 가진 게임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각각의 게임이 서로 다른 능력을 요구하다보니 플레이어가 자신이 없는 게임에는 낮은 점수를 배당하고, 반대로 자신이 있는 게임에는 높은 점수를 배당하는 것으로 각 플레이어간 점수 격차를 줄이고 균형을 맞추고자 한 게임이었습니다.

 그리고 곤충 올림픽에는 레슬링 종목이 있었는데, 피자 세이버를 변형한 거미 컴포넌트로 손가락으로 튀겨 그 탄성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덮어야 이기는 게임이었습니다.


 분명 튀기는 손맛은 있는데, 뒤집어졌을 때의 난감함과 익숙하지 않은 조작감 때문에 자칫 게임이 영영 끝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지요.

 그에 대한 피드백을 이야기하던 중, 개암나무님이 떠올리신 것이 지우개였습니다.
 바로 이것에서 지우개 레슬링의 시작일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개인 출판으로 지우개 레슬링을 크라우드 펀딩한다는 소식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 페이지 주소 - https://tumblbug.com/httpehail

 개암나무님은 이전에 개인 출판으로 '풀 카운트'를, 행복한 바오밥을 통해서는 '드랍 더 네트'라는 작품으로 게이머들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게임 외에도 여러 게임에 대한 목재 컴포넌트를 제작하시기도 하죠. 저는 처음에 게임 작가이기도 하실 거라는 생각은 못 하고, 컴포넌트 만드시는 장인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 네이션스 다이스 컴포넌트. 출처: http://bitly.kr/uENXOH7tmN

 개암나무님의 게임뿐만 아니라, 이렇게 본격적으로 고퀄리티의 목재 컴포넌트 제조 생산까지 하고 계시는 걸 보면, 상당히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노선을 타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풀 카운트드랍 더 네트는 기존의 보드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암나무님의 컴포넌트 퀄리티는 직접 보고 만져본 사람들은 알 수 있죠. 사실 사진만 봐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존에 없는 것, 그리고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개척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대중의 관심을 끌어야 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것은 뿌리부터 다시 시작해야하기 때문에, 이미 기반이 다져져 기존의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는 것과 이제 노하우부터 차근차근 쌓아 나가야하는 것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개암나무님께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표하면 일단 기대부터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우개 레슬링은 아무래도 우리가 꽤 익숙한 지우개 따먹기에 프로레슬링을 입힌 것이라서, 그 전 프로젝트들에 비하면 약간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기존 보드게임에서 지우개 따먹기를 메커니즘으로 한 경우가 없어 '지우개 따먹기를 보드게임으로 만든다고?', '지우개 따먹기로 보드게임을 만들 생각을 왜 못 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네요.

▲ 지우개 레슬링 체력 보드. 챔피언 벨트를 형상화.

 위에도 언급했지만, 지우개 따먹기와 프로레슬링은 핀폴이라는 공통점 아래 제법 잘 어울립니다. 보드게임에 있어서 시스템에 테마를 얼마나 잘 녹여내는가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우개 레슬링에는 어떻게 프로레슬링이 녹아들어 있을까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우개 레슬링을 프로토 타입으로 먼저 즐겨볼 수 있게 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풀 카운트를 가지고 계시다면 대충 지우개 레슬링에서의 목재 컴포넌트가 어떤 퀄리티로 만들어질 것인지는 쉽게 예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지우개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풀 카운트의 목재 재질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지우개 따먹기 자체는 매우 단순하고 원초적인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우개 레슬링에서는 이러한 단순함에 젓가락(박스 아트에서는 볼펜 꼭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만)이라는 도구로 조작해야만 하게끔, 그리고 사각형의 모양이 아니라 실제 사람을 형상화한 지우개 모델로 인하여 기존의 지우개 따먹기와는 다른 보다 섬세한 컨트롤이 요구됩니다.

 지우개를 움직일 수 있는 타점이 정해져 있고, 얼마의 힘으로 어느 부위를 누르면 어떻게 지우개가 움직여질 것인가도 나중에는 정확히 예측하고 계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는 당구의 그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사람을 형상화한 지우개로 인하여 다양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팔이 상대 지우개 얼굴 위를 덮는다거나, 발이 상대 지우개 얼굴 위를 덮는다거나. 그리고 지우개에는 앞면과 뒷면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별개의 판정이 존재합니다.

 프로레슬링에서는 심심치 않게, 상대에게 등을 보이고 있다가 회전력을 이용해 가격을 한다거나 아예 등, 엉덩이로 타격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지우개 레슬링에서는 기본적으로 마주 보는 상황이 만들어져야 타격으로 인정이 됩니다.

 예를 들면,


 이 경우는 타격으로 인정되지 않지만...


 이것은 타격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등을 보인 상태에서의 타격도 타격 아니냐고 하실 수 있는데요. 네, 가능합니다.

 지우개 레슬링에서는 단순히 상대 지우개에게 타격을 주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습니다. 데미지를 입혀서 상대방의 체력을 떨어뜨릴 것이냐, 체력을 떨어뜨리는 대신 기술 토큰을 가져와서 나의 레슬러를 강화할 것이냐, 아니면 이미 가지고 있는 기술을 업그레이드 시킬 것이냐. 바로 이 선택지가 지우개 레슬링을 보다 전략적으로 진화시킵니다.

▲ 디아블로 2 스킬 트리. 출처 - http://bitly.kr/NgvdgMIXae

 마치 디아블로 2에서 기술 테크 트리를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같은 직업이라도 전혀 다른 플레이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지우개 레슬링도 내 입맛에 맞는 테크 트리를 짤 기회가 있습니다.



 기술 토큰을 잘 읽어보면, 반대 방향도 공격 성공이라고 적힌 기술들이 있습니다. 이 기술을 얻게 되면, 이제는 지우개의 앞면 뒷면 상관 없이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반드시 반대 방향도 공격 성공 기술을 습득할 필요는 없습니다.
 프로레슬링의 링 위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로프 반동을 이용하여 다양한 상황이 만들어지죠. 플레이어는 의도적으로 지우개의 앞면과 뒷면을 바꾸기 위하여 로프 반동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로프 반동에는 체력을 1 소모해야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로프 스플레쉬 기술을 배운다면 로프 반동을 체력 소모 없이 구사할 수 있죠.

 현재 지우개 레슬링 프로토 타입의 기술 토큰에는 온전하게 와닿지는 않는 기술명이 있긴 하지만, 드롭 킥에는 상대 주사위 위에 걸쳐진 다리당 +1점의 추가 데미지, 뒤집기 반격이라는 고급 기술을 구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백 수플렉스 등은 지우개 싸움 안에서 사람 모양의 지우개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경우의 수를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초크라는 개념입니다.
 초크는 목을 조른다는 말이죠. 일종의 서브미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우개 레슬링에서의 초크는 내 지우개가 상대 지우개 밑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내 지우개를 조작했음에도 여전히 상대 지우개 밑에 깔리는 상황이 발생할 때 데미지를 입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커트 앵글이나 크리스 제리코처럼 서브 미션 기술이 피니시인 레슬러를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 크리스 제리코의 '월스 오브 제리코'.

 하지만 이런 서브미션 기술은 상당히 강력하기도 하고 실전 격투에서도 매우 유용해서 그런지 서브미션을 주류로 삼는 레슬러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꽤 계실 터. 빠져나가고 싶은데 빠져나가지 못하고 데미지가 계속 쌓이는 이 초크라는 개념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링을 보시면 홍코너와 청코너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원기둥 토큰을 이용해 자기 색깔을 표시하게 되고, 자기 색에 맞는 코너에 내 지우개가 닿으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나의 지우개가 무대에 등장하는 태그 시스템인데요. 사실 제가 생각하는 프로레슬링의 태그팀 개념과는 많이 다른 부분이긴 했지만, 게임적 허용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태그에 성공하게 되면, 주사위를 굴려 등장 위치를 정하게 되고 그 눈금의 결과에 따라 체력 회복도 노려볼 수 있습니다.

 태그 경기를 치를 경우, 단순한 1:1 대결과 양상이 또 달라집니다. 2:2 대결인데 태그를 활용하지 않고 싸운다는 건 1:2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힘든 싸움입니다. 기껏 체력을 다 깎아놨더니 태그를 이용해서 회복하면 그건 꽤 약오르는 일이거든요.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바로 기세입니다.
 

 사실 이 체력 보드는 단순히 체력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세도 섞여 있습니다.

 보통 프로레슬링에서 태그 팀 경기를 보면, 일방적으로 당하던 와중에 태그를 함으로써 대기하고 있던 팀원이 들어와 경기를 순식간에 뒤집어 놓는데요, 이것이 바로 기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데미지를 주었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으로 새로운 기술을 얻을 경우, 얻지 않기로 한 다른 기술에 체력 회복 토큰이 하나씩 쌓여가게 됩니다. 저는 이렇게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부가적으로 혜택을 주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체력 회복일 필요가 있는가 의구심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얻게 되어 갑자기 자신감이 넘치게 된다거나 기세가 오르는 것을 표현한 거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실제로도 프로레슬링에서 종종 바로 끝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피니시로 마무리하기 위해서, 또는 일부러 포효 등으로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도 하죠.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링 카운트 아웃입니다.

 프로레슬링에는 링 밖에 오래 있으면 자동으로 패배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지우개 레슬링에서는 바로 이러한 부분을 링 밖에서 내 차례를 맞이하면 체력 2를 잃는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링 밖에서 제때 링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체력을 잃고 어느 순간 자동적으로 패배하게 되죠.

 이로 인하여 실제로 지우개 레슬링이 일어나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지우개 따먹기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마냥 도망가는 플레이를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아빠는 다시 아들이 된다.

 지우개 레슬링을 플레이하면서, 게임 자체의 재미도 재미지만, 새록새록 잊고 있었던 어릴 적의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상대 지우개와 나의 지우개가 서로 포개어져 있는 장면을 보며, '아니, 이 장면은 그 경기의 그때 그 장면!'이라던가 '이 기술은 빅 풋인데요?', '이거 RKO 제대로 들어간 것 같은데요'하며 기억 한 켠에 숨어있던, 멋진 프로레슬링의 명경기, 명기술들이 시전되는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게임을 하지 않을 때에도, 컴포넌트를 보며, '이걸 이렇게 하면 이 기술도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던가 '골드버그의 스피어할 수 있게 알까기 허용하시죠', '영 좋지 못한 곳을 손으로 치게 되면 로우 블로가 되어 반칙 패'라던가, 추억과 더불어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마치 다시 그 시절 그 꼬마 아이가 레슬링 경기를 보며 흥분했던 것처럼요.

▲ 릭 플레어의 '로우 블로'.

 물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지우개 레슬링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기술도 있긴 하지만, 얼추 유명한 기술들은 상당량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물론 기술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잔룰이 늘어난다는 것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어 현재 지우개 레슬링은 기술의 종류가 많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궁무진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차후 확장으로라도 다양한 기술들이 나오길 벌써부터 기대하게 됩니다.

 기술 외 확장 요소로써는, 특히나 가장 인상 깊은 이벤트 중 하나였던 '헬 인 어셀'이나 생매장 매치로 불리는 '버리드 얼라이브 매치'도 구현될 수 있다면 정말 반가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우개 레슬링, 과연 나이 많은 아저씨들만 신날까요?


 프로레슬링은 둘째치더라도 지우개 따먹기 역시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르는 옛날 추억의 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요즘 아이들도 지우개 따먹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펭수가 유행이었다면 작년 한해 아이들에게는 브롤스타즈가 엄청 유행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브롤스타즈 캐릭터 지우개는 한때 노스페이스의 다운 점퍼 못지 않는(?) 등꼴 브레이커라는 소문입니다. 이게 가챠 요소가 있어서 원하는 걸 사주려면 몇 만원은 훌쩍 쓰게 된다고... 안 사주자니 지우개 따먹기를 할 때도 브롤스타즈 캐릭터 지우개가 아니면 껴주지도 않는다나 뭐라나? ㅎ

 아마 지우개 레슬링의 실제 제품도 브롤스타즈 캐릭터 지우개급 퀄리티로 제작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개암나무님이 말씀하시길 지우개 생산 수준만큼은 세계적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펀딩 페이지의 그림과 같은 퀄리티로만 나와줘도 상당히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요즘에도 이렇게 아이들이 캐릭터 지우개를 이용하여 지우개 따먹기를 즐기고 있었다니!
 지우개 따먹기야말로 아빠와 아들의 세대를 뛰어넘은 모두의 게임이 아닐까요?

 프로레슬링을 좋아했던 아빠는 아빠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서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젓가락을 이용해서 지우개를 조작해야하고 여러 가지 복잡할 수 있는 요소가 있지만, 아이들하고 즐길 때는 그런 거 다 쳐내고 그냥 손으로만 튕기며 가지고 놀아도 벌써 재밌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부디 지우개 레슬링의 펀딩이 성공하여, 아이들과 나란히 링 위에 오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그러려면 결혼을 해야겠지만, 결혼을 하려면 연애를 해야할테고... 안 될 거야, 아마.

좋아할 만한 글

0 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