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군 표류기 제 1화, 눈 떠 보니 산타 마리아 세계의 개척자였던 건

산타 마리아 박스 아트, 출처: 이노 나름 자주 가는 보드게임 카페 "마녀들의 혼합차(사실은 위치스브루)"에서 표지만으로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거의 유일한 게임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 산타 마리아(San...

산타 마리아 박스 아트, 출처: 이노

나름 자주 가는 보드게임 카페 "마녀들의 혼합차(사실은 위치스브루)"에서 표지만으로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거의 유일한 게임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산타 마리아(Santa Maria)".

'그림이 좋다'라는 나의 평가에 항만을 테마로 부산 보드게임 공모전 2017 수상을 위해 이름마저 바꿔서(이름따윈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출시한 보드게임 "부산"의 두 작가님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러스트는 구리다고. 산타 마리아를 보고, 일러스트나 UI가 별로여도 게임만 괜찮으면 좋겠지하며 부산은 잘 될 줄 알았다고.

아니, 진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개나리에 부드러운 생크림을 섞어놓은 듯한 연노랑에 은은한 커피향을 담은 것만 같은 커피색 테두리의 폰트 조화와 더불어 얽힌 듯 섥힌 듯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이루면서도 균형을 해치지 않는 타이틀 서체 디자인. 게다가 푸른 바다와 살짝 보이는 모래사장, 그리고 다시 푸른 나무와 잔디에 나무색의 조화는 자연친화적이고 시각적인 편안함을 준다. 구름 가득한 하늘과 살짝살짝 보이는 돌과 도끼날을 표현한 무채색, 그리고 주인공과 범선에 표현된 십자가에 쓰인 붉은 계열의 강조색상. 모든 색감의 조화가 적절하다. 그림체 역시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명암의 표현이 너무 서양적이지도 않고 적당히 보기 좋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산타 마리아의 일러스트가 구리다고?!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 소중한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잠시만 부산을 살펴보자.
부산 박스 아트, 출처: 텀블벅
……그만 살펴보자.

아무튼 눈길을 사로잡는 게임이고 플레이하고 싶었던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언급만 되고 실제 플레이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하고 지나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 떠보니 "산타 마리아"의 세계인 것.
왜인지는 생략한다. 어차피 콘셉트니까.

아무튼 "산타 마리아"는 일러스트의 단서들(범선, 건축하는 일꾼, 총독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등)을 종합해보고 판단했던 것인데 분명 식민지 개척을 주제로 하고 있을 게임일 것.
그리고 실제 게임 속 세계도 그랬다.

산타 마리아라는 이름에서 보건데, 박스 아트의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할아버지는 위대한 탐험가(다소 멍청한 부분도 있었지만)이자 잔인한 학살자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틀림이 없다. 산타 마리아는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당시에 콜롬버스는 이곳이 인도이라고 굳게 믿었다...곤 하지만 나중에라도 깨달았다고 해도 그냥 모른 척하고 그대로 우겼을 것이다)으로의 신항로를 개척할 때 사용한 기함의 이름이다.

일본에서 복원한 산타 마리아호, 출처: 나무위키

아무튼 저런 무지막지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 밑에서 인도(혹은 중국…은 아니고 실제로 이 게임은 아이티 섬이 배경일 확률이 크다)를 개척해야 한다니.
게다가 평화주의자인 나에게 설마 원주민 학살을 하라 이말인가?

이 세계의 테마는 평화를 사랑하는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산타 마리아 게임 진행 모습, 출처: 이노
이세계 찬스를 이용하여 산타 마리아 세계의 구성을 둘러보니 직접적이진 않지만 원주민을 약탈하는 내용은 있었다(어디까지나 기본판 기준이다. 마녀들의 혼합차에는 산타 마리아 확장이 없다). 또한 원주민 마을로 의심되는 부락(어쩌면 우리 개척자들이 거점일 수도 있다)에 종교를 전파하는 부분은 무신론자에 비종교인인 나에게 큰 거부감을 주었다.

주교 타일(왼쪽)과 학자 타일(오른쪽)

공동 게임판

단순히 개척을 위한 일꾼 및 노동자만 함께 온 것이 아니라 종교인들과 학자들까지 대동되었다. 학자들은 식민지 개척 작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머리를 짜냈고 주교가 보낸 종교인들은 주로 행복도(승점)에 관련된 혜택을 주었다. 종교를 믿으면 행복해진다 이말인가? 이건 군생활 때 대대장한테 들었던 개소리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지만 아무튼 넘어가기로 한다.

라운드는 3라운드로 구성되어 있어서 꽤 짧다고 느꼈지만, 이 세계에서의 한 라운드는 1년의 개념이다. 즉, 이 개척 작업은 3년에 걸쳐 일어난다. 어쨌든 3라운드는 3라운드. 여전히 짧게 느껴지지만, 이때는 몰랐다. 생각보다 산타 마리아에 오래 갇혀있게 될 줄은(플레이 타임이 꽤 길다는 얘기).

장고: 분노의 추적자 오리지널 포스터, 출처: IMDb

게다가 이 분이라도 같은 세계로 빨려들어오셨다면...

주사위 6개가 그려져 있지만, 산타 마리아의 세계에서 이 하얀색 주사위는 모든 개척자들이 공동으로 따라야할 나라(이사벨 1세가 국왕으로 있는 카스티야 왕국)의 칙령 같은 것이었다(그랜드 오스트리아 호텔의 그것과 같은 주사위 일꾼 시스템).
먼저 온 사람부터 본인이 따르고 싶은 칙령을 먼저 가져가 자신이 담당하게 되는 개척지에 두고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인데 놀랍게도 뇌물로 은화를 지불하면 칙령 내용을 조작할 수 있었다(주사위1을 주사위2로 바꾸려면 은화 1(=2-1), 주사위1을 주사위 3으로 바꾸려면 은화 2(=3-1)와 같은 식).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다.

선착장에 있는 배들 역시 카스티야 왕국으로 보내야할 것들을 나타낸다.
이런 식민지 항해에는 막대한 자원과 재산이 필요하므로 콜롬버스 혼자서는 충당할 수 없다. 위대한 여왕 이사벨 1세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
하지만 투자 유치에는 언제나 투자자에게 이익을 배당해야만 한다(물론 이 게임에서는 안 해도 되긴 한다…만 안하면 손해).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배들은 이사벨 1세에게 보낼 일종의 배당금이다.
얼마나 나라에 헌신하였는가(자원을 갖다 바쳤는가)에 따라 매년 나의 개척지에 대한 영향력, 그리고 최종적인 평가에서도 큰 역할을 하니 조공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배는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가 있다.

개인에게 할당된 개척지, 출처: 이노
이 세계에 당도한 플레이어들은 각자 개인에게 개척해야할 땅이 할당된다.
은화를 보관하는 저장소와 각종 자원을 저장하는 저장소, 그리고 행복도를 저장하는 곳이 구비되어 있다. 자원 저장소는 각 자원들을 무한히 저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최대 3개까지 보관할 수 있는데 쓸데없이 현실적이다.

왼쪽은 내가 개척할 땅을 나타낸다.
2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나무 2개가 필요(나무 2개를 지불하고 2칸 짜리 타일 획득)하고 ㄱ 혹은 ㄴ자로 꺾인 3칸(일직선으로 3칸은 안 된다, 도대체 왜?)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나무 2개와 곡식 1개가 필요(나무 2개, 곡식 1개를 지불하고 3칸 짜리 타일 획득)하다.

왼쪽의 파란색 주사위는 나라에서 떨어진 칙령이 아니라 내 개척지에 대한 나 자신의 개인적인 명령을 나타낸다. 처음에는 하나의 칙령만 사용할 수 있지만 나의 신앙심을 증명하면 그만큼 영향력이 커져 총 3개의 칙령을 배포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하얀색 주사위는 세로 지역에 대하여, 파란색 주사위는 가로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학자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상, 항상 해당 줄의 마지막 행동 칸이 이번 해 동안 봉인되게 된다.

또한 돈이면 다 되는 게, 돈을 지불하면서 원하는 부락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이렇게 돈을 지불한 곳은 이번 해의 남은 기간 동안 봉인 상태가 된다).
다만 이 놈들이 돈 맛을 알아서인지 처음에는 은화1을 받지만 다음부터는 1개씩 늘려 은화2개, 은화3개 등을 요구한다. 돈미새.

아무튼 다시 산타 마리아의 세계로 돌아와, 본 세계에서의 개척 작업은 꽤 본격적이었다.


모든 식민지 개척 작업이 그렇듯이 가장 먼저 도착하여 가장 먼저 행동하는 플레이어가 대단히 유리한 고지를 가져갈 수 있었다. 순서가 늦을수록 남이 고르지 않고 남은 콩고물이나 뜯어먹어야 하니. 도대체 이 현실성 무엇.

이러한 게임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주사위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이점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나는 실제의 나와 다르게 매우 열심히 종교활동을 하여 나의 신앙심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오판이었다.

평화주의자인 나는 원주민 부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일을 가져오는 것을 지양했으며, 약탈 행위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리고 이것은 두 번째 오판이었다.

어떤 식으로 나에게 할당된 개척지를 꾸며나갈 것인지도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을 간과하여 심시티에서 폭망했다.


게임 후반부가 되었을 때, 나의 독실한 믿음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첫 번째 원정과는 다르게 두 번째 원정부터 그 사악하고 잔인한 모습을 보였던 콜롬버스처럼 해가 갈수록 정복자로서의 악명으로 얻는 명성(악명도 명성이라고 했던가)은 대단했으며, 가장 카스티야 왕국에 많은 조공을 한 개척자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게임을 마무리하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다.

일단, 그랜드 오스트리아 호텔에서 손님들 비위나 맞추던 시절보다 차라리 콜롬버스 밑에서 개척일을 하는 것이 더 나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비교하자면, 개인 취향으로는 "로렌초 > 산타 마리아 > 그랜드 오스트리아 호텔"로 정립할 수 있겠다.

"산타 마리아"에서 선택과 집중은 리스트가 너무 크다.
여러 가지 골고루 올리는 게 중요하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비효율적인 테크트리도 있다. 예를 들면 종교 트리라던가, 그 다음으로 종교 트리라던가, 마지막으로 종교 트리라던가.
개척지에 대한 개인 칙령을 늘리는 것도 좋지만 역시 이 시대는 개인보다 국가의 명령이 더 강력한 시대였다(파란색 주사위보다 하얀색 주사위가 더 중요하고 내가 원하는 값이 나올 확률이 더 높으므로 가로줄보다는 세로줄에 투자하는 것이 옳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실제 역사대로 처음엔 호의적으로 농사 짓고 나무 자원이나 얻고 평화롭게 지내다가 슬슬 학살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어 무력으로 끝장을 보는 것 같았다. 역시 인류의 역사는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져있고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반복된다.

공동 게임판이나 개인 개척지판에서 소구역으로 나누었을 때, 개별적인 일러스트는 개인적으로 매우 좋지만, UI 디자인이 너무 군더더기 없이 딱 게임만 신속히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말은 역시 유로 게임에서 테마는 거들 뿐이라는 진리랄까?
더 이쁘고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었을 텐데, 그냥 딱 봤을 때 아직 덜 완성된 프로토 타입의 느낌이 난다는 것이 아쉽다.

내용물을 보았을 때, 정가 자체가 너무 높은 것 같은 기분이 있지만, 산타 마리아를 만든 회사는 어쩐지 메이저급 회사는 아니고 약간 소규모인듯 하다.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소규모 생산 업체의 생산 단가가 높은 것일까. 아무튼 게임 내용에 비해서는 다소 비싼 것 같은 느낌이 있지만, 확실히 재미는 있다.
타일 배치를 이용한 심시티 요소도 있고, 주사위 일꾼도 경험할 수 있고, 세트 수집도 경험할 수 있고. 다양한 게임 시스템을 절묘하게 잘 녹여냈다.
유로 게임에서 테마는 거들 뿐이라고 언급했지만, 사실 테마 자체도 그럴싸하고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정도로 잘 스며들어있다. 종교색이 강한 건 좀 의외지만, 당시 시대상이니까 뭐.

개인적으로 그랜드 오스트리아 호텔은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산타 마리아는 그랜드 오스트리아 호텔와 같은 공동 주사위 일꾼을 씀에도 불구하고 행동 선택에 훨씬 자유로운 편이고 그렇게 빡빡하지도 않아서 '그랜드 오스트리아 호텔을 해보고는 싶은데 살짝 부담스러울 것 같다'는 우려 때문에 망설이는 분들이 계시다면 일단 산타 마리아 한 번 즈려밟고 넘어 가볼만한 좋은 교두보가 될 것 같다.

타일을 배치해서 개척지를 설계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요소(다음 라운드에 나올 주사위는 무엇일까, 어떤 줄이 가장 많이 활성화될 수 있을까 하며 타일을 놓는 것도 즐거운 고민)이니 타일 배치나 나만의 마을 같은 걸 만드는 걸 좋아하는 분들도 충분히 좋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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